What Is Cooking, Phaidon, 2020
부제는 "행위: 요리, 결과: 요리"다. 우리 사전은 cooking과 cuisine을 구분하고 있지 않아 옮기면 이렇게 된다. 따라서 나는 조리(調理)와 요리(料理)라고 쓰고자 하는데, 기존에 블로그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한도끝도 없을 것 같아 본 글에서는 Cooking을 "조리"로, Cuisine을 "요리"로 하고자 한다. 고문헌에서 나오는 표현을 써볼까도 생각해봤는데 팽재(烹宰)보다는 차라리 조리가 익숙하지 않은가?
하여간 언어의 장벽을 걷어내고 나면, 조금 속 편하게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 아니 그럼 왜 이 글도 영어로 쓰지? 싶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이 책을 한국어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권하고자 한다. 영어권 사람들이야 알아서 하라지. 내가 진실로 이 책이 필요하다고 믿는 곳은 바로 여기 지금이다. 왜 본 서적인가. 절대 가격이 싸지 않다. 아마존에서 할인가로 파는 가격이 92달러고 중고로 사도 80달러가 넘는다. 그럼에도 현재 서울의 요리과 미식 등등에 대한 전반에 대해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필요한 서적이 바로 이 책이라고 믿는다. 그 어떤 쿡북이나, 「On Food And Cooking」같은 기존의 개론서보다도 중요하다.
페란 아드리아의 El Bulli 재단은 궁극적으로 모든 형태의 미디어들을 통해서, 파인 다이닝, 가능하면 그 이상의 모든 식행위 전반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를 관통하는 방법론으로 Sapiens라는걸 만들고 있고, 그 체계에 따라 착실하게 출판물들을 발간하고 있다. 다만 현재로서는 거의 전부가 스페인어라는 점이 문제되지만, 본 서적은 그중에서도 가장 앞부분에 해당하므로 독해에는 무리가 없다. Sapiens는 특정한 지식을 이해하고, 또 그를 통해 새로이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개략적으로 "특정한 것에 대한 질문-그에 대한 보편과학적 이해"를 틀로 하고 필요한 내용만을 간추려서 이해는 빠르게, 대신 확장의 가능성을 폭넓게 제공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등장하기 쉽게 접근하는 방법론이다. 말로 하면 흐리멍텅해 보이지만 일단 그렇다. 이 책도 대략적으로 각 주제가 이런 식으로 기술되는 편이다.
우선 본서는 역사서가 아니다. 이해하는데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예시와 논거를 제시하지만, 반증 가능성의 눈으로 책을 본다면 다시 보고 싶은 지점들이 많을 것이다. 또한 사전을 들이밀면서 단어의 의미에 대해 꾸준히 논해가며 진행되기 때문에 애초에 그 단어가 완전히 외국적인 것에 불과한 한국어 화자들에게는 와닿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을 다시 읽을 가치가 있으며, 특히 남에게 반드시 권하고 싶은 도서이다.
먼저 목차를 살펴보자.
- 요리하는 인간(Cuisine Sapiens)
- 어휘의 의미론적 접근을 통해 시작해보자
- 요리의 탄생
- 사람은 조리할 때 무엇을 하는가? 또 무엇을 위해 조리하는가?
-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매일 조리를 한다. 요리사는 한 가지만 존재할 수 없다
- 조리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접근
- 상세히 설명하는 요리 재료들
- 우리는 무엇을 조리하고 어떻게 조리하는가?
- 논의한 것을 바탕으로, 조리란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행위로서 조리가 생성하는 결과
"Cuisine"에 대해서 거의 논하지 않으면서도, 이 책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스스로 답함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요리와 조리를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먹고 살기 위한 요리에게 alimentation이라는 단어를 주고, 감각적 만족을 위한 요리에게 hedonism을 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리고 그 둘을 넘어선 공간에서 예술로서의 요리의 존재 가능성을 비추어 낸다.
이 책에서는 요리의 거의 가능한 모든 부분들을 여러분이 살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각 부문에 대한 고찰이 결코 해답으로는 이어지지 않으며 그 부분은 독자에게 남겨져 있다. 그러나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은 부분을 생각하게 해주고, 질문하지 않은 지점을 질문하도록 하는 점에서 거의 완벽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요리에 대해 충분한 고민을 가졌던 이에게는 흥미로운 복기가 될 지언정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한 비법서로서는 거의 무용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요리사가 그렇게 많았는가.
바로 이런 책이 필요했고, 이런 논의가 필요했다. 가능만 하다면 요리사들과 손님들이 이 책을 단체로 돌려본 뒤 토론이라도 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모두를 위해서. 페란 아드리아는 고급 미식의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하는 사람이다. 마음만 먹으면 황금 옥좌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은둔하거나 민중을 기만하는 재미로 살고도 남을만한, 거의 모든 것을 지닌 사람이다. "엘 불리"를 난생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들이 그걸로 유세를 떠는데 이 사람은 그곳의 주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층위의 요리가 고루 발전할 수 있도록 기꺼이 돕는다.
가장 기본적인 예시를 소개해 보자. 본 책은 시간과 개념상 조리로부터 요리를 추출해내는데, 프랑스식 서비스Service à la française나 러시아식 서비스Service à la russe같은 개념은 본서를 통해 처음 접하는 독자가 대부분일 것이다. 네이버에 검색해도 이걸 주제로 한 현대미술 작품이 나올 뿐 이런 사장된 서비스는 한국에서 교육된 적이 없다. 짠 음식과 단 음식(savoury / sweet)의 전통적인 구분에 대해서도 저자는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양자는 단순히 지배적인 맛이 단맛이냐 짠맛이냐를 넘어서, 재료를 사용하는 목적이 다르다는 점을 제시한다. 이름을 붙여보자면 목적설의 입장인 것이다. 적어도 이런 주관이 우리에게는 과연 만족스럽게 존재했는가.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하실 부분, 고급 요리, 비싼 요리와 인기 있는 요리, 신기한 요리, 파인 다이닝 등등은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그냥 요리와 구분되는 개념인가에 대해서도 가장 만족스러운 답변을 하고 있다. 저렴한 한 끼 식사가 여러분을 크게 만족시켰을 날도 있고, 차려입고 간 중요한 날의 식사가 모든 걸 망쳐버렸을 수도 있다. 그럼 대체 좋은 요리란 뭘까, 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저자는 고급 요리(Haute-cuisine), 인기있는 요리, 복잡한 요리, 비싼 요리 등을 구분하고 각 의미를 고찰한다. 가치 평가는 여러분의 자유로 남지만 혼용만큼은 막는다. 요리를 전적으로 예술의 영역에 진입시키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역사적으로 긴 세월을 가지지 않았으며, 애초에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답이 여러모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요리를 예술, 적어도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지나가야 할 책이다.
저자는 많은 부분에서 요리가 여전히 많은 회색 지대를 남기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며 우리에게 계속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은 커녕 기본적인 부분에 대해서 확인만 할 수 있어도 이 책이 매우 제값을 하리라 생각한다. 본 블로그는 서적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독후감도, 서평이나 문학비평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므로 본서를 구매하는 충동을 발생시키기 위해 충분한 예시를 들었으리라 본다.